아름다움과 젊음에 모든 것을 걸었던 여자 글라디스가 법정에 서 있다. 혐의는 젊은 남자를 유인해 살해했다는 것.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정말로 그 남자를 죽였을까.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이렌 네미롭스키의 장편소설 『제자벨』은 한 여자의 파멸을 통해 ‘악녀’라는 낙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생히 추적한다. 여자로서의 자신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며 타인의 삶과 행복을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고 마는 글라디스의 모습에는 작가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온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프랑스 문단의 샛별로 떠오른 1929년부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1942년까지, 13년 남짓한 집필 기간 동안 평생치의 작품을 쏟아낸 비운의 작가 네미롭스키를 꾸준히 소개해온 레모는 『제자벨』을 국내 초역으로 펴내며 그의 작품 세계를 한층 선명한 윤곽으로 완성한다.
편집자의 말 7
제자벨 13
옮긴이의 말 297
저자 : 이렌 네미롭스키 이렌 네미롭스키(Irene Nemirovsky)는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불행하고 외로웠다. 금융가였던 아버지는 늘 사업으로 바빴고, 어머니는 어린 딸을 유모에게 맡기고 자신의 삶을 누렸다. 이 시절 작가는 절망에 맞서기 위해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키웠으며, 이러한 모녀 관계가 작품 세계의 큰 축을 이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아버지의 목에 현상금이 걸리면서 네미롭스키 가족은 핀란드와 스웨덴 등지로 도피했고, 1918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이렌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며 열여덟 살부터 습작을 시작했고, ‘피에르 네레(Pierre Nerey)’라는 필명으로 짧은 소설들을 신문에 기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도회Le bal」이다. 1929년에는 4년 동안 집필한 『몰락David Golder』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제자벨Jezabel』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네미롭스키가 창작의 절정기에 이른 1936년,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발표된 작품이다. 「무도회」와 『고독의 와인Le vin de solitude』에 이어 증오심을 창작의 연료로 삼아 비틀린 모녀관계를 폭로하는 ‘어머니를 향한 복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집필한 미완의 대작 「프랑스풍 조곡Suite Francaise」의 두 작품 『6월의 폭풍Tempete en juin』과 『돌체Dolce』가 2004년에 비로소 빛을 보면서 르노도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르노도상 제정 이래 처음으로 작가의 사후에 수여된 사례였다. 두 작품의 성공이 계기가 되어 작가의 다른 작품들 역시 활발히 재조명되었다. 다른 대표작으로 『개와 늑대Les chiens et les loups』가 있다.
역자 : 채단비 프랑스 뤼미에르 리옹2대학교에서 응용문학을 전공했다. 동 대학원에서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잠』을 비교 연구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한국어 교육과 통번역을 병행하고 있다. 동서문학상과 재외동포문학상에서 각각 수필 부문 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며 작가의 꿈도 키우고 있다.
전쟁과 전쟁 사이, 균열하는 세계의 자화상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글라디스 아이제나흐가 재판을 받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죄목은 귀족 애인이 있음에도 아들뻘인 ‘베르나르’를 방에 끌어들여 죽였다는 것. 그러나 글라디스는 눈물로 결백을 호소해야 하는 법정에서도 자신을 감추려고만 한다. 젊은 남자를 유혹하고 소유하려 했다며 세상 사람들이 뒷공론을 늘어놓지만, 그 누구도 글라디스라는 사람의 진짜 인생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일평생 사랑을 좇았으나 단 한 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가장 큰 상실에 맞닥뜨린 순간에조차 그것이 상실인 줄도 몰랐던 여자의 이야기를. 그러나 젊음과 아름다움이 진정 권력이라면, 그 유효기간이 다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제자벨』은 모든 것을 가진 글라디스가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차갑고 생생하게 그린다. 삶의 전면에서 한발 물러나 다음 세대의 행복을 축복하는 것이 미덕인 나이에 여전히 아름다움과 젊음을 무기처럼 휘두르려 하는 글라디스의 모습이 도덕적 불편함을 안기면서도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작가는 글라디스라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그치지 않고 흔들리는 질서와 계급의 균열, 세대 갈등과 같은 그 내면이 자라난 토양까지 샅샅이 들여다본다. 지나간 전쟁의 상처와 다가올 재앙이 안개처럼 드리워진 도시, 불안 속에서 향락에 탐닉하는 귀족들과 날로 팍팍해지는 현실의 벽에 신음하는 서민들, 기성세대에게 기회를 빼앗겼다고 외치는 젊은이들… 저마다 불안과 결핍을 안은 채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1936년 파리의 인간군상이 소설 전체에 핍진성과 긴장감을 더한다.
이렌 네미롭스키만의 눈부신 악의로 가득한 ‘어머니를 향한 복수 3부작’의 절정!
『몰락』을 발표한 1929년부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1942년까지, 네미롭스키가 작가로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13년 남짓이었다. 그중에서도 비시 체제의 반유대주의 법령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지극히 짧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시간의 틈새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제자벨』이다. 작품의 동력은 작가 자신의 오랜 상처에서 비롯되었다. 부유했지만 불행했던 어린 시절, 딸을 위해 곁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둔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은 작가로 하여금 마음의 어둠을 헤집는 글을 끊임없이 쓰게 했다. 「무도회」(1930)와 『고독의 와인』(1935)을 지나 『제자벨』로 이어지는 ‘어머니를 향한 복수 3부작’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토록 진한 악의와 음습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네미롭스키의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그가 보여주는 복수와 증오의 충실한 공모자다. 그가 보여주는 추악한 얼굴을, 그래서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얼굴들을 남김없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이유운 시인의 추천사는 『제자벨』을 읽는 경험을 정확히 겨냥한다.
소설의 제목이 된 ‘제자벨(Jezabel)’은 구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세벨’을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서구권에서 오랫동안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글라디스는 어떻게 ‘제자벨’이 되었을까. 네미롭스키는 그 낙인이 작동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여성의 권력으로 여겨지는 젊음과 아름다움, 즉 외모자본이 언젠가는 반드시 만료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 공포가 한 여성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다른 여성에게 향하는 순간들을. 늙은 여자를 혐오하고 젊은 여자를 증오하며 딸이 ‘여자’가 되는 순간을 막으려는 글라디스의 악행은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한 여성이 그것을 다른 여성에게 되돌려주는 자기혐오이자 타자혐오로서의 여성혐오이다. 낙인의 언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공포의 뿌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너희는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악녀라는 이름을 붙여왔느냐고1930년대의 제자벨이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추천사
이유운 (시인) 이렌 네미롭스키는 내가 책상에서 종잇장을 넘기는 나약한 관찰자인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글라디스의 늙은 뺨과, 마리-테레즈의 떨리는 목소리와, 베르나르의 성마른 걸음걸이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자신의 글을 읽으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증오에 빠져들어 복수를 다짐하는 자신의 공모자가 되기를 바란다. 살과 뼈를 가진, 선명하면서도 추악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내 앞에 끊임없이 들이댄다. 네미롭스키의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그가 보여주는 복수와 증오의 충실한 공모자다. 그가 보여주는 추악한 얼굴을, 그래서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얼굴들을 남김없이 들여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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