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 시인의 시집은 가족의 기억으로 오늘을 버티는 법을 익히는 성장일기이자, 부재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의 기록이다. 사랑은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결들, 이를테면 한 꼬집의 소금, 깜빡이는 건널목 신호, 식어가는 커피 향, 콩나물국의 몇 가닥 등으로 나타난다. 「소금 한 꼬집」에서 어머니가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 건네준 격려는 실패의 짠맛을 먼저 배워야 단맛을 알게 된다는 체온의 윤리다. 이 배움은 「홀로서기」의 전광판 앞까지 이어져, 현재의 휘청임을 유년의 넘어지지 않게 꽉 잡아 주던 아버지의 손으로 균형 잡는다. 과거는 회상에 머물지 않고 지금을 지탱하는 구조가 된다.
그러나 온기에는 상실의 그림자가 포개진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무시하던 활달함은 병상과 지팡이 사이로 옮겨가고, 차 조심하고, 이쪽저쪽 잘 보고 다녀라는 상투적 문장이 이별을 밀어내는 주문이 된다. 「그리움이 발등으로 툭 툭」은 찌르레기 소리와 목에서 나던 쇳소리 같은 물성으로 부재의 감각을 되살린다. 하지만 시인은 비탄에 머무르지 않고 「씀바귀 커피」에서 창가에 잔을 올려두는 의식을 통해 빈자리를 향으로 채운다. 쓰다면서도 좋아하던 그 향이 남은 자들의 돌봄으로 옮겨 심어진다.
이 시집의 미덕은 받은 애정을 자식에게 되돌리는 통로가 얼마나 구체적인가에 있다. 「건더기가 없다」에서 화자는 건더기 없는 국에서 콩나물 몇 가닥을 건져 아들에게 건넨다. 결핍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랑의 형식으로 바뀐다. 반대로 「식어버린 된장국」은 미숙했던 사랑의 밤을 보여주지만, 그 기억은 훗날 부엌으로 되돌아오는 배움의 씨앗이 된다. 가족은 어딘가로 완벽히 항해하는 선박이 아니라 서로의 무게를 나누며 안온을 모의하는 공동체다. 「만남」에서 살아 있는 재회와 죽은 이의 귀환이 같은 시간층에서 포개지는 것도, 가족의 시간이 개인의 시간표를 넘어 광장과 햇살, 콩의 질감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꿈꾸는 세계는 큰 구호가 아니라 작은 감각의 돌봄으로 유지되는 세상이다. 소금 한 꼬집으로 실패를 버티고, 커피 향으로 부재를 어루만지며, 콩나물 몇 가닥으로 시간을 나누고, 갈대처럼 함께 흔들리며 안온을 모의하는 세계. 부모의 애정은 잔향이 되어 일상의 리듬을 조율하고, 자식에게 흐르는 내리사랑은 결핍의 증빙이 아니라 돌봄의 기술로 승화된다. 그래서 ‘내일’은 끝내 알 수 없지만, 그 너머를 향한 걸음은 두렵지 않다. 건널목의 파란불처럼 깜빡이는 사이, 서로를 지나 이쪽과 저쪽을 잇는 보행의 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축적되어 있으므로.
1부 색 바랜 바람이 앉은 감나무
소금 한 꼬집/ 숨은벽/ 기억/ 홀로서기/ 몸살/ 둥근 풍경 속으로/ 표면과 이면/ 눈 속으로 날아드는 새/ 쏟아지는 봄/ 시간의 허리/ 책갈피/ 바짝 구운 거짓말/ 어린 이름을 묻고/ 나비/ 알 수 없는 내일/ 아버지의 솟대
2부 뜨거웠던 오월의 문
찔레 향/ 식지 않는 밥/ 씀바귀 커피/ 붉은 문/ 지워지지 않는 자국/ 쑥 향/ 벚꽃 편지/ 건널목/ 폭설/ 그리움이 발등으로 툭 툭/ 공짜 DNA/ 밥그릇/ 그땐 그랬지/ 어머니 발톱/ 돌아오는 길/ 장대비
3부 추억은 우편함에 먼지처럼 쌓여
습기/ 반쪽 사랑/ 건더기가 없다/ 기억 산책/ 그게 뭐라고/ 느린 걸음/ 안녕 미역국/ 왜 안 보였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기억의 뜰/ 식어버린 된장국/ 바람이라면/ 만남/ 낮잠/ 한 척의 가족/ 호제비꽃
4부 초록을 쓰다듬는 바람의 언어
무의도/ 별의 흔적/ 알아듣지 못한 말/ 꼿꼿한 천지/ 이기고 싶어요/ 들깨 순두부/ 골목길/ 석평리/ 노을/ 8월 어느 날/ 못난이 사과/ 칠 년의 울음/ 바다로 간 붕어/ 낡아진 시간/ 개망초/ 자물쇠
해설 _ 시 사랑 가족 사랑 인간 사랑을 실천하다 이승하(시인, 문학평론가)
저자 : 김란 인천에서 태어나 현재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언어의 뿌리를 찾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너머는 알 수 없는 내일」이 있습니다. 윤동주 탄생 106주년 공모전 최우수상, 방송대 문연 학술문학상 희곡부문 우수상, 전국 독서 분투기 장려상, 동서문학상 동시부문 맥심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의 결을 느끼며 모색하는 날들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겨울의 기억으로 찾아간 외갓집에는 감나무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데 마치 하늘로 뿌리내린 채 외할머니 댁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외할머니는 안개처럼 사라졌고 그 너머는 알 수가 없는 내일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법칙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고 시간 뒤에 영웅 없다.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남다른 인식이 이 시집을 제일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승하(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매일 변하는 구름 하늘이 쓰는 편지다 벚꽃이 피고 져도 오래도록 보내지 못한 답장
바람이 잔잔하게 기억을 스치는 날 잘 마른 볕에 앉아 ‘괜찮다’고 한 줄 답장을 쓴다
그리움이 다가앉는 계절이다
2025년 가을 彩雲 김 란
책 속에서
유난히 꽃이 보글대는 봄 해마다 찾아오는 긴 몸살을 힘겹게 떨쳐내고 나도 꽃피려나 보다 -「몸살」 부분
나뭇가지 눈이 툭 떨어질 즈음 끄르륵거리던 수도꼭지 봄을 쏟아냈다 그해 겨울은 느리게 지나갔고 -「쏟아지는 봄」 부분
구릿한 향을 묻혀 놓은 하늘 고요에 잠긴 공원
하늘까지 까마득한 계단 -「시간의 허리」 부분
안개처럼 사라졌지
너머는 알 수 없는 내일 -「알 수 없는 내일」 부분
잊혀진 바람 타고 금빛 나비 너울거리는
손목에 사는 나비 -「나비 」 부분
먹고 사는 게 뭐라고 그날 하늘에선 하얀 밥알이 하염없이 내렸다 -「식지 않는 밥」 부분
벚꽃이 피면 삐뚤빼뚤한 어머니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벚꽃 편지」 부분
비포장도로 뽀얀 먼지 속 달려오는 700번 버스
먼지 덮인 오래된 나무 의자 벌떡 일어나 달려간다 -「돌아오는 길」 부분
빼빼하던 플라타너스 아름드리 자랐더라 나무의 시간은 반대인가 봐 닿을 수 없는 너 바람이라면 좋겠다 -「바람이라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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